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산성 전투 (문단 편집) === [[건길지]]의 목이 [[노비]]의 손에 베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gwansansung123.png|width=100%]]}}} || || {{{#000000 현재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위성 사진 }}} || 이에 성왕은 본인이 없는 전방에서 태자가 분전하는 상황을 만회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보기 50'이라 적혀 그 50명 중 몇이나 기병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을 이끌고 밤을 틈타 신라군을 야습하려 한다. 신라는 사전에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온 나라의 군대를 모아서[* 《[[삼국사기]]》에 언급된, [[금관가야]] 왕족 출신인 김무력이 신주(지금의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원군을 이끌고 온 것을 말하는 듯하다.] 구천(狗川) 혹은 고리산(古利山)[*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조상 김무력의 전공을 설명할 때 성왕을 사로잡은 곳으로 언급된다.]에서 성왕 일행을 기습해 살해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일본서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의 [[긴메이 덴노]] 15년(554)조에 따르면 태자 여창[* 부여창, 후일의 [[위덕왕]].]은 관산성에서 승리한 후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멋대로 신라령에 더욱 깊숙히 쳐들어갔다. 아무튼 여창이 직접 참전한 1차 관산성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성왕은 태자의 건강을 염려하여[* 아마도 태자 및 군사들을 치하하고 전후 수습을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고 있었다. 즉 한국 사서의 기록에서 성왕이 신라군을 기습하고자 움직였다고 쓴 것과 달리, 일본서기는 성왕가 태자가 있는 본군에 합류하고자 움직였다고 하였다. 성왕은 신라군에게 사로잡혔고, 신라의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외위(外位)의 제3관등이다.] [[도도(신라)|도도]](都刀)라는 자에게 살해당했는데, 《[[일본서기]]》에는 해당 장면이 좀더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등장 인물의 이름도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얼마 후 고도(苦都)[*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간 도도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된다.]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주보돈]]에 따르면 이때 고도가 "맹세한 바를 어기면 왕이라고 해도 종놈한테 죽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신라의 국법" 운운한 부분에서 맹세한 바를 어긴다는 것에 대해, 신라에서는 법흥왕에 의한 율령 도입 이전부터 국가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뭔가 중대한 사안(강역 문제라던지)에 대해서 한 번 결정난 결과에 대해 '결정된 바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시키는 모종의 의식을 치렀는데, 그 근거로 봉평 신라비나 냉수리 신라비, 남산 신성비(새로 쌓은 성이 3년 안에 무너질 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 임신서기석(3년 안에 유교 경전을 통달하겠다는) 등을 근거로 그 '맹세'의 유효기간은 관습적으로 3년으로 통용되었을 거라고 해석했다(3년 안에 맹세를 어기면 죄를 받는다는 것). 관산성 공격 1년 전인 553년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는데, 백제야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앞서서 우호를 지속하려는 척 신라를 방심시키려는''' 책략이었겠지만 신라는 이걸 '''신라가 백제로부터 거의 빼앗다시피 한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에 대해 백제에서 더는 따지지 않을 것이고 우호도 지속하겠다'''는 표면상의 의미 그대로 해석했고, '어느 한 가지 맹세는 맹세한 시점으로부터 3년 동안 유효하다.'는 신라의 관습상 성왕이 계획대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한 것을 '먼저 맹세한 바를 어긴 것은 너희 백제다!'고 선언하면서 천한 노비인 고도가 한 나라의 군주인 성왕을 죽이는 합법적인 근거로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신라 입장에서 내세운 법적 근거인 셈이다.(출처: 주보돈 《백제 성왕의 죽음과 신라의 '국법'》).]【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임용한]]은 저서 《전쟁과 역사》에서 여러 정황을 볼 때 이 말은 실제 성왕의 유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 >《일본서기》 요약하자면, 《[[삼국사기]]》는 성왕이 관산성 전투를 지휘하다가 신라군에게 습격 당해 살해됐다고 기록했지만, 《[[일본서기]]》는 관산성 전투는 태자가 이끌었고, 성왕은 태자의 승리를 격려하며 전후 수습을 하기 위해 호위병력 소수만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사로잡혔다고 서술했다. 신라군의 습격으로 포로로 잡혔을 거란 설을 지지하는 정황증거는 신라군이 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왕을 구원하러 백제군이 언제 들여닥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백제군을 물리는 조건만으로도 백제 왕권에 손상을 주고 성왕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기에 석방하겠지만 당장에 승리가 고픈 신라는 성왕을 죽임으로 전투는 이겼지만 이로 인해서 백제 지배층은 신라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다.[* 외국의 비슷한 사례로 [[만치케르트 전투]]와 [[토목보의 변]]이 있는데 승전국이 상대국의 군주를 사로 잡았지만 어차피 상대방을 완전 점령할 능력이 없으니 포로로 잡은 군주를 돌려 보냄으로서 상대국의 정치적 혼란을 노렸다. 그 의도는 성공해서 [[동로마]]와 [[명나라]] 둘다 오랜시간동안 정치적 혼란에 빠져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